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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읽는 분들은 2017년 가을의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를 기억할 것이다. 핵발전소 건설을 두고 벌어진 최초의 사회적 논란이었고,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정책이 여론의 심판대에 올랐던 사건이었다. 당시 반핵과 찬핵 진영은 신고리5,6호기 공론화 과정을 핵발전의 지속 여부가 판가름나는 시험대로 간주하고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총력전을 벌였다.

그런데, 신고리 5,6호기 핵발전소 건설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주민협의회가 핵발전소를 유치하겠다고 신청했기 때문이고, 건설예정지인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 신리마을 주민들이 찬성했기 때문이었다.

신리마을 주민들은 왜 자신들의 마을에 핵발전소를 건설하는데 찬성했을까. 필자는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신리마을을 찾았다.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서 신고리 5,6호기 건설허가 안건을 한창 심의하던 2016년 6월 초순의 어느 날이었다.

 

신고리 핵발전소 5,6호기 건설 예정지인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 일대. 사진에 보이는 원자로는 신고리 3,4호기 핵발전소.

 

이른 아침 부산의 하늘은 잔뜩 찌푸려있었다. 밤새 심야고속버스에 실려왔지만, 취재비를 아껴야 하기에 다시 한 시간 남짓 버스를 타야 했다. 종점에 내리니, 고리핵발전소(원전)가 있는 기장군 장안읍 길천리다. 

신고리 5,6호기 건설예정지인 신리마을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 광역단위 행적구역이 다른 곳이지만, 이곳에서 고작 차로 십여분 거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신고리 5,6호기를 고리 9,10호기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신리마을에서 만나야 할 사람은 팔순의 어부 박정학 할아버지. 내려오겠다고 전화로 말씀은 드렸지만 아직 인터뷰에 응하겠다 확답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길천리의 커피숍에서 잠깐 시간을 보내다가 오전 9시쯤에 택시를 잡아타고 서생면으로 넘어갔다.

 

신리마을 입구에서 차를 내리자, 빗방울이 떨어졌다.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당할만큼 속을만큼 속아왔다. 이제는 신고리 5,6호기 건설반대로 복수한다"

'신리마을 보상 및 이주/생계대책위원회' 명의로 나붙은 현수막이었다. 아직 이주대책이나 보상에 대한 합의가 되지 않았다는 것인가. 좀 의외였다. 

 

마을 안으로 들어올때쯤 빗줄기가 굵어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장대비가 되어 쏟아졌다. 

눈앞에 수협공판장 건물이 보였다. 이층으로 올라가면 비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냅다 뛰었다.

거침없이 계단을 뛰어올라 빗방울이 튀기지 않는 안쪽으로 몸을 피했다. 아, 부산에서 렌터카를 빌려 올 걸...

한 십분 요란하게 쏟아지던 빗줄기는 한층 가늘어졌다. 박정학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박정학 할아버지는 골목 앞까지 우산을 쓰고 나오셨다. 

예쁜 나리꽃이 피어있는 아담한  골목이었다. 

할아버지의 집은 백 년의 역사를 지닌 집이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지으신 집이라고 했다. 벽체와 외양은 모두 바뀌었지만 기둥과 들보는 백년 전의 그것이었다. 

할아버지는 툇마루에 앉아 십년 전에 찍었다는 가족사진 액자를 보여주셨다. 박정학 할아버지 내외분을 중심으로 가족 삼대 이십 여명의 식구들이 함께 어울려 찍은 가족사진. 배경은 바로 유서 깊은 이 집이었다.

 

"이제 이곳도 떠나야지"

 

할아버지의 얼굴에 시원섭섭한 표정이 맴돌았다. 어쨌든 핵발전소 건설은 결정되었고, 이사를 가게 될 것이라는 게 할아버지의 생각이었다 . 하지만, 아직 신고리 5,6호기 원전의 건설허가가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서 허가 건이 논의중이었고, 부산과 경남 지역의 시민단체들이 신고리 5,6호기 건설 반대운동을 맹렬하게 펼쳐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결과는 아직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조만간 건설허가가 날 것이라 믿고 계셨다. 한수원이 거듭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필자를 툇마루에 앉혀두고, 할아버지는 마늘을 꿰어 처마에 매다는 일을 마무리했다. 며칠 전에 수확한 햇마늘들은 알이 튼실했다.

폭우를 뚫고 온 정성이 가상했는지, 할아버지는 일을 금방 마무리하고 들어오셨다. 할아버지는 방문 안쪽 벽에 등을 대고 앉으셨다. 카메라를 삼각대 위에 설치하고 녹화버튼을 눌렀다. 인터뷰가 시작됐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핵발전소 유치에 찬성하신건가요?"

 

대답은 조금 의외였다.

 

"신고리 3,4호기 때는 처음에 반대를 했지. 그런데 국정 사업이고 하니까 양보를 해줬는데... 서생면이 법적으로 원전단지가 된다는 말이 들리더라고요. 그러면 어느 세월에 가서는 여기까지 원전이 다 안 들어서겠나. 우리도 그런 마음이 들기는 들더라고요. 어차피 5,6호기 해야 된다고, 전력 때문에 그래야 된다고 그래서, 개인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좋을 때 해 주면 우리 요구조건을 좀 잘 들어주지 않겠나..."

 

요구조건이 무엇이었을까

 

"우리 집에서 나오면 바로 가깝게 원자력 들어와 있지, 침범해있지 그래서 우리가 버틸 수가 없는 거야. 원자력이 들어오니까, 후쿠시마 쓰나미 그런 걸 텔레비전으로 보고 그러니까, 쓰나미 같은 게, 지진 같은 게 안 일어난다고 볼 수 없지 않습니까. 만약에 자연재해가 일어난다면 바로 바닷가에 원자력 옆에 있는 걸 보면서, 거리를 두고 있는 게 안 낫겠나 싶은 생각도 해보고 그렇죠, 그런 마음이 안 들어가겠습니까, 남들은 어떨까 모르겠지만, 원자력이 가까이 이게 딱 이렇게 들어와 있으니까, 조금 사이가 떨어져 있어야 우리가 여유가 있어가지고 피할라 해도 피해할 수 있겠지만 여기 있으니까 왔다하면 바로 직통이니까."

 

신고리 핵발전소 3,4호기가 바로 마을 인근에 들어선 이후로, 늘 후쿠시마와 같은 중대 사고를 의식했고, 사고가 났을 때 도망갈 수 있는 거리를 의식해왔다는 것이다. 결론은 핵발전소로부터 더 먼 곳으로 떠나자는 것이었다. 핵발전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핵발전소 건설에 찬성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라니. 

 

세간에는 보상금을 위해 원전유치에 찬성하지 않았겠나 하는 곱지 않은 시선이 있었다. 

사실, 보상금은 충분히 받지 않았을까.

 

"보상은 아직 못받았지. 보상이 얼마 나오는지도 몰라. 우리는 보상보다 이주 대책을 먼저 마련해달라는 거야. 이주단지를 만들어달라는 거지. 근데, 그걸 잘 안들어주는것 같아. 한수원에서"

 

2014년 1월.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주민협의회는 신고리 5,6호기 자율유치신청서를 산업통상자원부에 제출했다. 한수원은 그 댓가로 1천5백억원 규모의 서생면 주민지원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울주군은 이와 별도로 1천여억원 규모의 지원금을 받기로 했다.

핵발전소가 들어선다고 해서 지역 주민들 개개인에게 지원금이 분배되는 것은 아니다. 이주대상자들에게 토지와 건물 보상금 및 이주비가 주어지는 것이다. 어업을 하는 주민들에게는  어업권보상이 별도로 주어진다. 땅과 집과 일터를 잃는 것에 대한 보상일 뿐이다.

그러나, 아직 확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주계획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공사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다. 

 

"배수로인가 그 공사를 하는데, 물 밑에 바위를 깬다고, 쾅 쾅 폭음이 나는데, 그 때마다 깜짝 깜짝 놀래. 이웃집에는 벽에 금이 가기도 했고... 빨리 떠나야 되는데, 이주단지가 언제 될른지..."

 

할아버지는 착잡한 표정으로 믹스커피를 들이켰다.

인터뷰는 사십 분만에 끝났다. 길게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다만, 신고리 3,4호기 건설 당시에 신리마을 주민들이 얼마나 강하게 반대운동을 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며칠 후, 신고리 3,4호기 핵발전소 반대운동의 중심부에서 활동했던 부산환경운동연합 서토덕 선생을 만나, 그 당시 이야기를 소상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상범 전 울산시의원이 찍었던 당시 사진들도 보았다. 신리마을 주민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원전을 막기 위해 싸웠다. 그 패배의 여진은 조상 때부터 뿌리박은 삶의 터전을 미련 없이 포기할 정도로 컸던 것이다. 누구도 그들의 선택에 대해 쉽게 논평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정학 할아버지와의 짧은 인터뷰를 끝내고 신고리 3,4호기를 보기 위해 신리마을 뒷산을 끼고 도는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십 분 쯤 걸어가니 맞은 편에 둥근 콘크리트 지붕 두 개가 시야에 들어왔다. 신고리 3,4호기 핵발전소였다. 길 끝에 이주 대상 지역의 빈 집들이 눈에 띄었다. 골매마을이었다.

골매마을은 거주제한구역 경계인 핵발전소 반경 700미터 이내에 위치해 있어서 철거 및 이주 대상이 된 것이다.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 낭떠러지가 있었다. 그리고 불과 몇 미터 폭의 바닷물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거대한 신고리 3,4호기 핵발전소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3호기는 시험가동 중이었고, 4호기는 마무리 공사 중이었다.

 

3,4호기 핵발전소 아래 방파제에서는 몇 명의 낚시꾼들이 가랑비를 맞으며 바다낚시에 몰두하고 있었다. 핵발전소에서 배출되는 온배수 때문에 핵발전소 부근에서 고기가 잘 잡힌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한수원 직원들이 정기적으로 핵발전소 앞바다에서 낚시대회를 연다는 이야기도 떠올랐다. 저 낚시꾼들은 어디서 온 사람들일까.

 

텅빈 마을과 신고리 3,4호기의 돔을 한 앵글 안에 잡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 골매마을 뒷 편 언덕으로 올라갔다. 언덕 제일 높은 곳에서 사진을 몇 컷 찍고, 신리마을을 내려다보려고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그 때, 거대한 구조물이 필자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건설공사 현장이었다. 외벽 간판에 '신고리 5,6호기 수중 취배수구조물 공사'라고 적혀 있었다. 시공사는 SK건설이었다.

순간, 박정학 할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다. 폭발음에 깜짝 깜짝 놀라고 벽에 금이 간다는 그 공사. 바로 그 현장이었던 것이다. 아직 원자력안전위원원회에서 신고리 5,6호기 건설 허가를 내 주지 않았지만, 전원개발촉진법에 의거하여 수중 취배수구조물 공사는 '합법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수중 취배수구조물이란 핵발전소 원자로에 냉각수를 공급하기 위해 바닷물을 끌어오고, 핵발전소로부터 온배수를 바다로 내보내는 긴 파이프라인이다. 핵발전소의 주요 설비 중 하나다. 핵발전소 건설 허가가가 나지 않았음에도 주요 설비가 이미 건설중에 있다. 원자로의 핵심 설비인 증기발생기도 이미 발주를 했을 것이다. 한국의 핵산업계는 이렇게 일 해왔다. 공기를 맞추어야 한다는 핑계로 건설 허가가 나기도 전에 일부 공정을 진행해버린다. 건설허가를 기정사실로 취급하는 것이다. 건설허가가 안 날 것이라는 상상을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핵산업계의 관행이고 관습이었다.

 

만약 건설허가가 안 나거나 정책적인 이유로 건설이 취소되면, 이미 진행한 공정은 매몰비용으로 취급된다. "투입한 돈이 아까우니 건설해야 한다"는 논리가 등장하는 것이다. 건설허가가 나기도 전에 진행한 자신들의 잘못은 외면하고 말이다. 일년 후, 신고리 5,6호기 건설 공론화 국면에서 역시나 이 매몰비용 논리가 전면에 등장했다. 씁쓸한 '합법적' 현장이었다.

 

이튿날 새벽 6시. 

오랜만에 출어를 하는 박정학 할아버지의 작은 어선에 몸을 실었다. 이웃마을에 사시는 해녀 두 분을 태우고 마을 앞 바다로 나갔다. 

마을 앞 포구에서 출발하여 모터에 속도를 올리고 3분 정도 달리니 바닷가 언덕 위에 신고리 3,4호기 핵발전소가 보인다. 그 오른 쪽 언덕이 신고리 5,6호기 건설예정지다. 다시 5분 정도 남쪽으로 달려가니 신고리 1,2호기 핵발전소가 맞은편 언덕 위에 있다. 박정한 할아버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저 쪽에 고리 1,2,3,4호기의 둥근 지붕들이 눈에 들어온다. 5분 정도 더 남쪽으로 가면 저기에 닿는다고 한다.

지금 이곳이 울산과 부산의 경계, 고리원전과 신고리 원전 단지의 경계다. 고리1~4호기와 신고리 1,2호기는 행정구역상 부산에 속하고, 신고리 3~6호기는 울산에 속한다. 그러나 바다 위에도 언덕 위에도 그 경계는 보이지 않는다. 방사능도 온배수도 부산이냐 울산이냐 따지지 않는다. 

 

박정학 할아버지는 경계수역에서 배를 돌렸다. 고리 원전 근처에서는 오래 전부터 조업을 안한다는 것이다. 위험하게 느끼기 때문이란다. 신고리원전 근처는? 그저 웃으신다. 

해녀 아주머니 두 분은 아까부터 물에 들어가서 열심히 작업 중이다.

 

"주로 무얼 잡으세요?"      

 

"성게하고 미역을 주로 따지요" 

 

양식을 하지 않고 자연산을 채취하는 것이다.

 

"어획량은 어떠세요?"

 

"요즘은 많이 줄었어요. 그게 원전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갈수록 양이 계속 줄어요"

 

"평생 어업을 하셨나요?"

 

"평생 했지요. 국민학교 졸업하고부터 배를 탔으니까. 이제 이사 가면 이것도 못하지"

 

"왜요? 바닷가로 가시면 되지 않나요?"

 

"어업권 보상 받으면 물에 못들어가니까."

 

"원전이 없었으면 어땠을까요?"

 

"글쎄... 원전이 아예 안들어왔으면 안 나았겠나 싶기도 하지만, 나라에서 하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나"

 

씁쓸한 표정으로 핵발전소를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해녀 아주머니들의 조업이 끝날 때에 맞춰 다시 데리러 나오면 된다면서 포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을 포구쪽으로 뱃머리를 돌리자 핵발전소의 둥근 지붕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우리는 말없이 바람을 맞으며  바다 위를 달렸다. 

할아버지가 뱃머리를 넓은 바다 쪽으로 틀더니 멀리 보이는 다른 포구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가 신암리인데, 저기 이주단지를 만들어달라고 부탁을 해놨거든. 저기서 살 수 있으면 좋겠어. 바다를 보기라도 하게..."

 

신리마을에서 박정학 할아버지를 만나고 보름 정도가 지난 후,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서 신고리 5,6호기 건설 허가 안건이 가결되었다. 전국의 환경단체들은 격렬한 톤으로 원자력안전위원회의 결정을 비판했다. 

 

1년 후, 문재인 대통령은 고리원전 앞에서 탈원전정책을 선언했다. 그리고, 4개월 후,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중단할 것인가 계속할 것인가를 두고 공론조사가 진행되면서, 전국적으로 논란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신리마을을 비롯한 서생면 주민들은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계속해야 한다며 가장 처절하게 앞장서서 싸웠다. "보상금 주고 이주시켜준다는 말만 믿고 30년을 원전 옆에서 참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원전을 안짓는다면 우리는 어쩌란 말이냐"라는 게 그들의 슬픈 외침이었다. 그 대열 속에 박정학 할아버지도 계셨을까.

 

 

글 : 남태제 (다큐멘터리 감독, 전 뉴스타파 <목격자들> 취재 연출)

 

* 취재원 보호를 위해 등장인물의 성함을 바꾸었습니다. 글 중간에 나오는 '한수원'은 핵발전소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에너지공기업 '한국수력원자력'의 줄인 말입니다.    

 

"발전소 주변 주민들이 암에 걸릴 정도로 방사능이 심하다면, 정작 발전소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왜 암에 안 걸리나?"

 

핵발전소 지역 주민 중 갑상선암 환자 618명이 핵발전소의 방사능 때문에 갑상선암에 걸렸다며 한국수력원자력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낸 2015년 이후로 종종 나오는 이야기다. 사실을 근거로 한 일종의 논리적 반박인 셈. 

 

이런 말을 들을 때면, '핵발전소에서 일하다가 암이나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는 없는 모양이구나' 아니면, '핵발전소 방사능 피폭으로 암이나 백혈병에 걸렸다고 인정받은 사례가 없는 모양이구나'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엄청난 규모로 방사능이 유출된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 당시에도 방사능 피폭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고 하니, 큰 사고가 없었던 우리나라 핵발전소의 경우는 방사능으로 인해 암이나 백혈병에 걸리거나 사망한 경우가 없을 만도 하다는 생각을 쉽게 하게 된다. 

 

과연 그런가?

답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핵발전소에서 일하다가 방사능에 피폭되어 백혈병과 암에 걸렸다고 국가로부터 산업재해 판정을 받은 노동자들이 분명히 존재해왔고, 이로 인해 사망한 분들도 분명히 존재해왔다. 다만 조명받지 못했을 뿐이다.  

 

다음은 요약적으로 제시한 그 사례들이다.  

 

 

2000년, 최초의 방사능 피폭 암 발병 인정 - 울진핵발전소 기계용접공 정OO씨

 

최초로 산재 판정을 받은 이는 울진 핵발전소에서 기계용접공으로 일했던 정OO씨다. 정씨는 핵발전소의 유지 보수를 담당하는 한국전력 자회사 한전기공(지금의 한전KPS)에 1987년 입사하여 1997년까지 울진 핵발전소 현장에서 용접 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1989년 이후 방사선 피폭 구역에 529회를 출입하였으며, 1997년 9월 예방계획 정비 공사에 참여했다. 1997년까지 TLD(열형광선량계 : 방사선량계측기)로 측정한 방사선 누적선량은 18.53mSv(밀리시버트)였고, 가장 많이 피폭된 해는 1994년으로 5.8mSv였다. 

정씨는 1997년 11월에 급성골수성백혈병 확진을 받았고, 1999년 5월에 사망했다. 유족은 정씨가 사망한 후 산재보상보험을 신청했지만, 회사 측에서 산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유족은 업무상 질병 여부 판정을 요구했고, 2000년 12월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직업병심의위원회는 "핵발전소의 정비과정에서 방사선에 피폭된 것이 확인되었고, 방사선 피폭에 의해서 급성골수성백혈병 등 혈액암이 비교적 소량 피폭으로도 발생할 수 있음이 알려져 있고, 다른 알려진 유해요인에 노출된 적이 없으며, 피폭선량이 소량이지만 미국의 인정기준인 원인적 인과확률(Probability of Causation, PC) 의 95% 신뢰상한 값에 해당되어 미국의 기준을 참조하여 업무 관련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이로써, 정씨는 한국의 핵발전소 노동자들 중에서 방사능 피폭으로 인해 암과 백혈병이 발병한 최초의 공식적인 산업재해 피해자가 되었다. 

당시 이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고(故) 임현술 동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의 글을 아래에 첨부한다.  

1호 산재인정 의사의 회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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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간 방사능 노출로 인한 췌장암 사망 황OO씨 - 2008년 서울고법 판결로 10년만에 산재 인정 

 

1975년부터 24년동안 핵발전소에서 방사선 취급업무 등을 해오면서 상당량의 방사능에 노출되었던 황OO씨는 1999년 췌장암으로 사망했고, 유족은 근로복지공단에 업무상재해 신청을 냈다. 근로복지공단은 이를 거부했고, 유족은 소송을 냈다. 1심에서는 패소.

그러나, 2008년 서울고법 특별8부(재판장 최병덕 부장판사)는 원심을 취소하고 노동자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황씨는 방사선관리구역에 출입하면서 방사능 오염사고 등을 처리하는 등 피폭량이 상당하고, 이에 비춰보면 방사선 피폭이 췌장암 발생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고 밝혔다. 

황씨의 24년간 누적피폭량은 58.74mSv로 국제방사선방호학회가 제시한 방사능구역 작업자 허용선량(5년간 100mSv)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학회가 제시한 허용선량은 암 발병과는 큰 관련이 없으며, 췌장암 발생여부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고 하면서 “달리 발병원인이 될 만한 요인이 없었으므로 방사선 피폭이 적어도 하나의 원인이 됐다고 추단할 수 있으므로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참고로, 일반인의 연 평균 피폭 허용선량은 1mSv로, 방사능구역 작업자의 피폭 허용선량은 일반인의 20배이다. 

 

 

2008년 고리핵발전소 11년 근무 변OO씨 백혈병으로 사망, 이후 6년만에 산재 인정받아

 

핵발전소에서 11년간 근무하다, 2006년 급성골수성백혈병 확진 판정을 받은 변OO씨는 2008년 세상을 떠났다. 유족은 산재 판정을 청구했으나 근로복지공단 부산동부지사는 청구를 거부했다. 3(인정) : 4(불인정)이었다. 

변씨는 고리핵발전소에 1995년 3월14일 입사해 방사선 관리구역내 기기점검 및 관리, 발전소 안전관련 기기고장, 사전 점검시 작업조건 형성, 방사성 폐기물 이송업무, 방사선 관리구역 환경개선 사항 점검업무를 2006년 8월까지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방사선에 16.51mSv 피폭되었다. 방사선 관리구역 출입한 시간은 3211.8시간이며 출입횟수는 총 1,837회였다.

1999년에 백혈병으로 사망한 정OO씨의 누적 피폭량 18.5mSv와 비슷한 수치였고, 병명도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같았지만, 산재 인정을 받은 정씨와 달리 변씨는 산재 인정을 받지 못했다. 

변씨의 부인과 대면했던 한 의사는 변씨의 백혈병 발병원인에 대해 “근무환경이 백혈병이 발병할수 있는 충분한 여건에 있었다”고 소견을 밝혔다.

결국 변씨의 유족은 소송에 들어갔고, 법원의 조정 결정으로 산재 인정을 받아냈다. 피해자가 사망한 지 6년만이었다.  

 

 

21년간 98mSv 피폭, 췌장암 사망 정OO씨, 5년만에 소송으로 산재 인정

 

1983년부터 2004년까지 21년간 고리핵발전소에서 일하면서 98.23mSv에 달하는 많은 양의 피폭을 당한 정OO씨는 췌장암과 위암 진단을 받고 2006년에 사망했다. 그가 기록한 누적피폭량은 이전에 산재 인정을 받은 사례들보다도 현저히 높은 피폭량이었음에도 근로복지공단은 방사능구역 작업자의 1년 피폭 허용선량 20mSv의 21배인 420mSv에 미달한다는 이유만으로 산재 인정을 거부했다. 

정씨의 유족은 소송을 냈고, 5년만인 2013년에 부산고등법원에서 승소판결을 받아 산재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처럼 핵발전소 운영사인 한국전력측과 산업재해 판정기관인 근로복지공단은 기본적으로 백혈병이나 암으로 인한 사망과 방사능 피폭 간의 연관성을 부정해왔고, 피해자와 가족들은 오랜시간 고통 속에서 법정다툼을 벌여야 했다.

이런 일은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월성핵발전소 압력관 교체작업 후 혈액암 발병, 그러나 엇갈린 산재 판정 

 

2009년부터 2011년까지 한전KPS 소속 2년 계약직 노동자로 일했던 이OO씨와 한전 KPS의 하청업체 A사에 단기 계약직 노동자로 일했던 김OO씨는 월성 핵발전소 원자로 압력관 교체작업에 동원되었다. 핵연료봉이 핵분열을 일으키는 고방사능 구역에서의 작업이었다.  

2년간의 작업 후, 두 사람은 혈액암에 걸렸다. 이씨는 2017년 혈액암의 일종인 골수형성이상증후군 확진 판정을 받았고, 김씨는 2013년에 혈액암의 일종인 호지킨림프종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이들은 지금까지 계속 투병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이씨는 작업 기간동안 총 42.16mSv, 김씨는 2009년 7월 ~ 2010년 3월까지 9개월간 21.32mSv 피폭됐다.

이씨는 2019년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재 판정을 받았다. "골수형성이상증후군을 비롯한 백혈병이 50mSv 이하의 저선량 피폭에도 발생 가능하다는 역학적 연구가 있으며 미량이지만 내부 피폭도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골수형성이상증후군'은 작업 중 방사선 등 유해물질에 노출되어 발병한 것으로 판단되므로, 업무와 상당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러나, 김씨는 산재 판정을 받지 못했다. 호지킨림프종이 저선량 방사선 피폭으로 발생한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김씨는 소송을 냈지만 1심에서 패소했고, 현재 항소 중이다. 

 

 

멀리는 2000년도부터 가까이는 지금까지 핵발전소 노동자들은 암과 백혈병에 걸려도 산재 인정을 곧바로 받지 못하고 지난한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100mSv 이하 저선량 피폭으로 인한 암 발병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핵산업계와 원자력 학계의 완강한 고집으로도, 핵발전소 노동자들이 방사능 피폭으로 암에 걸리고, 백혈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영원히 가릴 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반인 피폭허용량보다 최대 50배나 높은, 방사능구역 작업자의 피폭허용량이 과연 합리적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박찬호 반핵의사회 운영위원의 글을 첨부한다. 많은 참고가 되시기를.

한국의-선량규제-현황과-문제점.-박찬호-선생님.-2019.9.2.-반핵의사회-8월9월-소식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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